일제강점기는 단지 정치·경제적 수탈의 시기였던 것이 아니라, 언론의 자유가 철저히 억압된 ‘정보 통제의 시대’였다. 일본 제국은 조선인의 사상과 여론을 통제하기 위해 철저한 검열 제도를 시행했고, 민간 언론의 탄생과 활동은 극심한 제약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지식인과 언론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된 틈을 비집고 민족의식을 전달하려 하였다. 불법 출판물, 은어 사용, 우회적 비유, 외국 매체 연계 등 창의적인 저항이 언론의 형식을 빌려 전개되었다. 본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활동했는지, 그리고 혹독한 검열을 어떻게 회피하며 민족 정체성을 지켜냈는지를 분석한다.
📌 일제의 언론 검열 체계 개요
조선총독부는 <조선신문령>(1907년)과 <출판법>(1909년)을 통해 조선 내 모든 인쇄물에 대한 사전 검열과 인가제를 시행하였다. 신문·잡지·서적은 발행 전후 모두 검열을 받아야 했고, 민족주의적 내용은 물론 정치적 해석이 가능한 문장조차 삭제되거나 폐간 처분을 당했다.
📌 주요 언론 활동과 검열 회피 전략 비교
매체/단체 | 활동 내용 | 검열 회피 전략 | 성과 및 한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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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 민족계 대표 신문, 계몽기사 연재 | 우회적 풍자, 체육·학술 기사로 위장 | 다수 정간·폐간, 사회적 영향력 유지 |
《조선일보》 | 문학·농촌운동 중심 기사 게재 | 은유적 문장, 한자어 활용 | 검열 피해 반복, 독자층 확대 |
서간도 광복회 기관지 | 독립군 활동 상황 전달 | 비공식 유통, 암호·약칭 사용 | 소수 유통, 정보 전달 효과 높음 |
해외 한인 신문 (신한민보) | 미주 한인 대상 독립운동 보도 | 국외 출판, 국내 은밀 유입 | 국내 검열 회피 가능, 유통 제한 |
📌 은어와 우회 표현의 활용
언론인들은 검열을 피하기 위해 ‘직접 말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했다. 예를 들어 '국권 회복' 대신 ‘밝은 내일’, ‘독립’ 대신 ‘광명’, ‘총독부’ 대신 ‘외세의 힘’과 같은 우회적 표현을 활용하였다. 비문학 기사에서는 체육·학술·종교의 형식을 빌려 민족 정체성을 우회적으로 전달했다.
📌 문학과 언론의 결합 전략
신문의 문예란을 활용해 독립 의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사례가 많았다. 김동인, 이광수, 염상섭 등은 소설 속 등장인물과 상황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풍자하였고, 이는 언론 활동의 연장선으로 기능했다. 문학은 언론 검열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최후의 통로’로 간주되었다.
📌 해외 매체와의 연계 및 역수입 전략
미국, 중국, 러시아 등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발행한 신문은 국내에 몰래 반입되어 유통되었다. <신한민보>, <자유신보> 등은 국내 매체보다 훨씬 자유로운 언론 환경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조선 내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반면 유통 경로가 제한적이어서 대중적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 언론 검열 속에서도 지켜낸 저널리즘
《동아일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의 사진 중 일장기를 삭제하여 보도하는 용기를 보였고, 이는 결국 강제 정간 조치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례는 언론이 단순한 정보 전달 기관을 넘어서 ‘저항의 기록자’였음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다.
📌 결론: 말할 수 없던 시대, 그러나 결코 침묵하지 않았던 언론
일제강점기의 조선 언론은 철저한 검열과 억압 속에서도 끝내 침묵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민족의 마음을 담았고, 독자들은 그 함의를 읽어냈다. 검열을 피하려는 기술은 곧 저항의 미학이 되었으며, 언론은 그 어떤 무기보다 조용하지만 강력한 독립운동의 도구가 되었다.